로버트 고다드
로버트 고다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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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882년 10월 5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 우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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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 | 1945년 8월 10일 미국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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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미국 과학자 |
| 주요 업적 | 로켓 개발 세계 최초로 액체 연료를 사용한 로켓 발사 |
로버트 허칭스 고다드(Robert Hutchings Goddard, 1882년 10월 5일 ~ 1945년 8월 10일)는 로켓의 선구자로 널리 알려진 미국의 과학자이다. 1926년 3월 16일 그는 세계 최초로 액체 연료를 사용하는 현대적 개념을 로켓을 쏘아 올렸다. 1935년에 이르기까지 그는 로켓을 시속 880킬로미터의 속도로 비행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그는 그의 생애 동안 그의 업적을 인정받지 못했고, 그의 이론은 비아냥거림을 받기까지 하였다. 그의 사후 그의 업적이 재평가되었고 지금에 이르러 “로켓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생애 [편집]
고다드는 매사추세츠 주의 우스터에서 태어났다. 그는 5살부터 과학에 흥미를 가졌고, 16살에는 H.G. 웰스의 고전 SF인 《우주 전쟁》(1898)을 읽고 우주에 대한 흥미를 가졌다. 그는 그 이듬해 1899년 10월 19일에 뒷뜰의 높은 앵두나무에 죽은 가지를 잘라내려고 올라갔는데, “나는 나무에서 내려왔을 때 올라갈 때와는 다른 소년이었다. 마침내 존재가 매우 뜻깊게 여겨졌다.”고 훗날 적었다. 나무 위에서 그는 한 평생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우주 비행의 개발에 전념하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날을 개인적인 기념일로 삼고 잊지 않았다.
그는 클라크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1914년까지 스미스소니언 협회로부터의 재정 원조을 받아 로켓 모터의 설계에 착수했다. 1919년에는 달 비행의 가능성에 대해 집필했다.
고다드는 1926년 3월 16일에 매사추세츠 주의 어번에서 최초의 액체 연료 로켓을 쏘아 올렸다. 그 역사적인 사건을 그는 일기에 간결하게 “액체연료를 사용하는 로켓의 최초의 비행은 어제 에피 아줌마의 농장에서 행해졌다.” 라고 기입했다. ‘네루’라고 명명된 로켓은 인간의 팔만한 크기로, 2.5초 만에 41피트를 상승했다. 그것은 액체 연료 추진의 가능성을 증명한 중요한 실험이었다.
고다드는 타인을 신용하지 않고 혼자서 연구를 진행해 그 실적의 파급은 한정되었다. 그의 비사교성은, 다른 과학자 및 미디어로부터 받은 혹평에 의한 것이었다. 고다드의 획기적인 논문 《초고공에 도달하는 방법》에 대해서 뉴욕타임스는, 진공 상태에서는 로켓을 추진시킬 물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작용·반작용의 법칙이 성립하지 않고) 날아갈 수 없는 것을 누구라도 알고 있다고 극렬하게 비판했다. 기사에서는 “고다드가 고등학교에서 배워야 할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라고 비난했다.
1929년에 행해진 실험 때, 많은 구경꾼이 모여 소방서에 통보되는 소란이 발생했다. 찾아온 신문기자들에게 고다드는 과장된 기사를 싣지 않도록 간절히 부탁했지만, 우스터의 지방 신문은 “달 로켓은 238,799.5 마일의 목표를 잃었다.”는 표제로, 달을 목표로 한 로켓이 실패해 공중에서 폭발했다고 하는 내용의 기사를 게재했다. 실제로는 신문기자가 본 로켓의 잔해는 낙하한 로켓이 지면에 격돌한 것이었고, 로켓은 예정된 고도에 도달하여 실험은 성공했던 것이다. 고다드는 그 일을 필사적으로 설명했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매사추세츠 주내에서의 로켓 발사 실험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 뉴스로 로켓 연구에 흥미를 가진 찰스 린드버그의 추천에 의해 새로운 자금을 원조받아, 이후에 UFO 소란으로 유명해지는 뉴멕시코 주 로스웰로 실험장을 옮길 수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고다드는 미국 해군을 위해서 로켓 공학의 연구를 실시했지만, 해군은 그 연구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했다. 유일한 예외는 함재기를 단거리의 활주로에서 발진시키기 위한 보조 로켓이었다. 짓궂게도, 그의 연구에 가장 흥미를 가진 것은 나치 독일이었다. 나치 독일의 과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은, 고다드의 이론을 참조해 V2로켓을 완성시켰다.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이 있기 바로 전날에 뉴욕타임스는 49년 전에 발표한 고다드에 대한 사설을 철회했다. 뉴욕타임스는 고다드의 실험을 보다 진행된 실험과 조사라고 불러, “17세기의 아이작 뉴턴의 실험 결과를 확인해, 대기 중에서와 마찬가지로 진공 상태에서도 로켓을 추진할 수 있는 것은 명확하게 확인되었다. 뉴욕타임스는(작용·반작용의 법칙을 잘못 해석하고 있던) 잘못을 후회한다.”라는 사설을 발표했다.
1945년에 후두암으로 사망하기까지, 고다드는 자신이 고안·발명한 것에서 214개의 특허를 얻었지만,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었던 그 자신의 성격도 있고, 그의 생전에는 그것들이 각광을 받는 일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그의 사후에 이루어졌다. 1960년, 미국 정부는 고다드의 모든 특허를 그의 미망인으로부터 100만 달러에 매입했다. 1959년에 설립된 고다드 우주 비행 센터와 《신스타트렉》에 등장하는 셔틀 크래프트 고다드는 그를 기념하여 명명되었다.
아폴로 11호가 달에 도달했을 때, SF작가인 아이작 아시모프는 고(故) 고다드를 향해, 「고다드야, 우리는 달에 있다」라고 하였다.
연표 [편집]
- 1882년 10월 5일, 매사추세츠 주 우스터에서 태어남
- 1908년 우스터 폴리테크닉 대학교 졸업
- 1919년 《A Method of Reaching Extreme Altitudes》 출판
- 1920년 1월 12일, 뉴욕타임스에 비판 기사 실림
- 1924년 6월 21일, 에스터 크리스틴 키스크와 결혼
- 1926년 3월 26일, 매사추세츠 주 어번에서 그의 첫 로켓 발사
- 1930년 뉴멕시코 주 로스웰로 이주
- 1945년 8월 10일 사망
- 1969년 7월 17일, 뉴욕타임스가 그에게 공식 사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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