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랑조제프마리위스 앵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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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로랑조제프마리위스앵베르

로랑조제프마리위스 앵베르〔Laurent-Joseph-Marius Imbert, 1796년 3월 23일~1839년 9월 21일, 한국이름 범세형(范世亨)〕주교는 천주교 조선교구 2대 교구장이다. 프랑스 마리냔(Marignane)의 가난한 농촌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다. 그는 1818년 파리 외방전교회신학교에서 공부했다.

해외 선교[편집]

1819년 12월 18일 사제 서품을 받은 앵베르는 1820년 선교사중국에 갔다. 중국에 도착하기 전, 그는 영국령 말레이시아 페낭의 칼리지 제너럴(College General)에서 1821년 4월에서 1822년 1월까지 강의를 맡았다.

1821년 시암(타이)대목구장이었던 에스프리 마리 조제프 플로랑(Esprit-Marie-Joseph Florens) 주교싱가포르로 가줄 것을 요청했다. 플로랑 주교는 싱가포르천주교회선교 거점을 열려고 계획했다. 그는 싱가포르 섬을 둘러싼 위험이나 환경에 대해 확실히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젊은 선교사인 앵베르는 1821년 12월 11일에 싱가포르에 머물면서 싱가포르의 정황을 조사하였다. 1주일간 머물러 앵베르 신부는 싱가포르에서 천주교 미사를 올린, 싱가포르 교회사 최초의 천주교회 신부가 되었다.

1822년 그는 마카오를 향해 항해했으나 직접 그곳에 도착할 수 없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통킹에서 2년간 머물렀다. 그는 중국에 도착하여 12년간 쓰촨성에서 지내면서 신학교를 설립했다.

조선 선교와 순교[편집]

싱가포르의 좋은 목자(Good Shepherd) 대성당에 있는 앵베르 성인의 성유물.

천주교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이던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입국을 앞두고 갑자기 선종하자, 1836년 4월 26일 앵베르는 천주교 조선교구 2대 교구장과 카프사(Capsa)의 명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1837년 5월 14일 그는 만주를 통해 천주교 박해가 행해지던 조선으로 잠입했다.

몰래 천주교의 전도 활동과 교세 확장에 힘쓰던 앵베르 주교는 1839년 8월 10일 밀고를 당했다. 체포당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시간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미사를 올린 뒤 그를 기다리던 관리들에게 가서 자현했다. 그는 한양으로 보내져 해외 선교의 거처를 알기 위해 고문을 당했다. 모든 해외 선교사들이 행방을 드러내면 개종한 신자들이 용서받을 것이라 생각한 그는 동료 천주교 신부인 피에르 모방 신부와 자크오노레 샤스탕 신부에게 조선 관가로 가서 자현할 것을 권고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는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좋은 목자는 자신의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라고 썼다.

성직자는 함께 감옥에 갇혔다. 그들은 그들이 개종시킨 천주교 신자들의 이름과 행방에 대해 3일 동안 심문을 받았다. 계속된 고문에도 자백하지 않은 그들은 다른 감옥에 수감된 뒤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참수당했다. (기해박해)

그의 유해는 길에 방치되어 있었다가, 약 20일이 지나서야 노고산에 묻혔다. 그러다가 1843년경기도 과천으로 이장되었으며, 1901년 지금의 명동 대성당 지하실에 모시게 되었다.[1]

1925년 79명의 조선 순교자들을 시복할 때 이 세명의 순교자들이 함께 시복되었고, 1986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울에서 103명의 순교자들을 시성할 때 함께 시성되었다.

그는 당시 신도의 전기 편찬을 계획하였는데, 그 전기인 <기해일기>가 1858년 파리에서 간행되었다. 성 로랑조제프마리위스 앵베르의 축일9월 20일(이전에는 6월 10일)이다.

더 보기[편집]

참조[편집]

  • Eugene Wijeysingha (2006), Going Forth... - The Catholic Church in Singapore 1819-2004, Titular Roman Catholic Archbishop of Singapore, ISBN 981-05-5703-5

출처[편집]

  1. 가톨릭 사전
전 임
브뤼기에르
제2대 천주교 조선대목구 대목구장
1835년 - 1839년
후 임
페레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