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너드 스키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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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너드 스키너드(Lynyrd Skynyrd)는 미국의 서던 록 밴드다. 블루스 록의 오버드라이브된 힘과 반항적인 남부의 이미지 그리고 하드 록의 호탕함을 융합시켰다. 스키너드는 올맨 브라더스의 재즈적인 즉흥 연주에 의존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방탕하고 정력적인 로큰롤 밴드였다. 그들은 무대에서 영원히 잼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음악은 블루스, 록 그리고 컨트리에서 단단히 자리를 잡을 것이다. 대중을 위해 레너드 스키너드의 시골 노동자적 이미지는 그들의 리더였던 로니 반 젠트의 탁월한 작곡 능력을 묻히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밴드의 초기 녹음을 통해 반 젠트는 시적인 가사를 쓰는 재주를 드러냈고 로큰롤보다는 컨트리와 마찬가지로 매우 정직했다. 스키너드의 인기가 상승하던 70년대 중반, 불운한 비행기 사고로 두 명의 멤버와 같이 죽은 반 잰트의 재능은 그제서야 수면으로 떠올랐다. 스키너드는 비행기 사고 이후 해체했지만 10년 후 재결성했고 90년대 초반 콘서트 활동을 지속했다.

결성[편집]

플로리다 주 잭슨빌의 고등학교에 재학하던 보컬 로니 반 젠트와 기타리스트 앨런 콜린스와 개리 로싱톤은 마이 백야드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몇 달안에 그룹은 베이시스트 레온 윌키슨과 키보디스트 빌리 파웰을 투입했고 밴드 이름을 레너드 스키너드로 바꿨다. 그 이름은 머리가 긴 학생들을 체벌하기로 악명이 높았던 그들의 체육 교사인 레너드 스키너를 비꼰 것이다. 드러머 밥 번즈와 함께 레너드 스키너드는 남부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첫 해에는 그룹은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프로듀서 알 쿠퍼는 1972년 푸노치오스라 불리던 애틀란타의 클럽에서 그들이 연주하는 것을 본 후 밴드를 MCA와 계약하도록 했다. 쿠퍼는 1973년 그룹의 데뷔를 주선했다. 예전에 스트로베리 알람 클락의 기타 리스트였던 에드 킹이 밴드에 가입하고 난 후 데뷔 음반인 Pronounced Leh-Nerd Skin-Nerd를 녹음하였다. 그룹은 그들의 3단 기타 공격으로 유명해졌다. 그것은 최근(1973년)에 사망한 듀언 올맨을 기리는 “Free bird”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레너드 스키너드는 그 곡으로 전국적인 인기를 누렸으며 그것은 앨범 록 라디오의 주요 선정곡이 되었으며 수 십 년간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전성기[편집]

“Free Bird”와 후의 1973년도 Quadrophenia 투어의 오프닝 무대를 장식할 기회로 레너드 스키너드는 많은 헌신적인 팬을 거느렸으며 그것은 그들의 두 번째 음반인 1974년의 Second Helping이 엄청난 히트를 치는데 도움을 주었다. 닐 영의 “Southern man”이란 곡에 대한 응답으로 유명한 히트 싱글 “Sweet Home Alabama”이 수록된 두 번째 음반 Second Helping은 12위까지 기록했으며 멀티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그 해 말 아티머스 파일은 드러머 번즈의 자리를 대체했으며 킹은 그 후 잠깐 밴드를 떠났다. 새 6인조는 1975년에 Nuthin Fancy를 발매했는데 그것은 밴드의 최초의 10위권에 진입한 곡이 되었다. 그 레코드는 1976년 탐 다우드가 만든 “Gimme Back My Bullets”에 의해 모방되었다. 그것은 2개의 전임자에 비해 그다지 성공한 음반은 아니었다. 그러나 밴드는 지속적인 투어를 통해 팬을 거느렸으며 더블 라이브 음반인 “One More from the Road”로 녹음되었다. 1976년 말에 발매된 그 음반은 밴드의 새로운 기타리스트인 스티브 게인과 여성 백보컬 세 명이 특징이 되었으며 그것은 스키너드의 두 번째 10위권 음반이 되었다.

불행의 시작[편집]

레너드 스키너드는 6번째 음반인 Street Survivors를 1977년 10월 17일에 발매했다. 3일 후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그린빌에서 로스앤젤레스의 바톤 라우지로 향하던, 멤버들을 태운 개인 전용기가 미시시피 주 길스 버그에서 충돌했다. 로니 반 젠트와 스티브 게인 그리고 그의 여동생이자 그룹의 백 보컬 중 한 명이었던 캐시가 죽었다. 남은 멤버들은 부상을 입었다. 충돌의 원인은 연료 부족이거나 비행기 기술자의 실수 둘 중 하나이다. Street Survivors의 표지는 불에 활활 타는 밴드 그림이었는데 충돌 후에는 표지가 바뀌었다. 비극이 발생한 주 앨범은 밴드의 가장 히트한 것 중 하나가 되었다. 레너드 스키너드는 사고 후 해체했고 Skynyrd's First and...Last in 1978라는 이름의 초기 데모 콜렉션을 발매했다. 그것은 사고 이전에 발매될 계획이었다. 더블 음반 컴필레이션인 Gold & Platinum는 1980년에 발매되었다.

끊임없는 불행[편집]

1980년 말 로싱톤과 콜린스는 새로운 밴드를 결성했다. 자연스럽게 밴드의 이름은 로싱톤 콜린스 밴드가 되었으며 4명의 살아남은 멤버들로 구성되었다. 2년 후 파일은 아티머스 파일 밴드를 결성했다. 콜린스는 1986년 자동차 사고로 여자 친구를 잃었고 몸은 마비가 되었다. 4년 후 그는 호흡 곤란으로 사망했다. 1987년 로싱톤과 파웰, 킹, 윌키슨은 레너드 스키너드란 이름으로 밴드를 다시 구성했다. 보컬리스트 조니 반 잰트와 기타리스트 랜돌 홀을 투입하였다. 밴드는 재결성 투어에 참여했고 그것은 1988년 더블 라이브 음반인 Southern by the Grace of God/Lynyrd Skynyrd Tribute Tour -- 1987로 발매되었으며 재구성된 스키너드는 1991년 녹음을 시작했고 남은 십 년간 밴드는 활발히 투어를 했으며 가끔 음반을 냈다. 새로 구성된 스키너드는 자주 드러머를 바꾸었지만 그들의 사운드에는 그다지 영향이 없었다.

그 후[편집]

90년대 중반 레너드 스키너드는 앨러배마 주 방위군의 명예 대령 훈장을 받았는데 그들의 최고의 록 걸작인 “Sweet Home Alabama” 때문이었다. 90년대 중반 반 잰트와 로싱톤, 윌키슨, 파웰은 두 명의 서던 록 베테랑을 스키너드의 기타리스트로 투입해서 그룹을 재정비했다. 예전에 블랙풋이라는 그룹의 프론트맨이었던 리키 메들록과 전에 아웃로우라는 밴드에서 활동했던 휴이 토마슨이었다. 뎀 양키라는 그룹에서 마이클 캐틀론은 드러머로 투입되었고 1997년 앨범 Twenty로 CMC 인터내셔널과 재계약하였다. 이 라인업은 1998년 스틸타운 레코드에서 Lyve를 발매했으며 다음 해 Edge of Forever를 발매했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노린 음반은 2000년 가을에 발매되었다. 비록 윌키슨은 1년 후 사망했지만 레너드 스키너드는 재정비하여 2003년 Vicious Cycle이라는 음반을 녹음했다. DVD와 CD로 발매된 Lyve: The Vicious Cycle Tour는 다음 해 발매되었고 2006년에는 Face to Face라는 음반을 냈다. 죽음의 귀신이 또 다시 밴드를 덮쳤고 라인업은 바뀌길 계속했다. 그것은 밴드의 위력을 계속 소모했다. 레너드 스키너드에서 1972년부터 베이시스트였던 윌키슨은 2001년에 사망했으며 이언 에반스에 의해 대체되었다. 에반스는 2009년에 사망했다. 토마슨은 그의 밴드 아웃로우를 다시 결성하기 위해 2005년 밴드를 떠났고 2년 뒤에 사망했다. 그의 자리는 2006년 핫 애플 파이 출신의 마크 스파키 마텟카에 의해 대체되었다. 원년 키보디스트인 파웰은 2009년 56세의 나이로 플로리다 주 잭슨빌 근처 집에서 사망했다. 그 해는 새 스튜디오 음반인 God + Guns이 로드런너 레코드에서 발매되었다. 프리덤 홀에서의 라이브는 2010년 동명의 이름으로 발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