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검-쏘아이뭇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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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검-쏘아이뭇 전투
날짜 1785년 1월 19일
장소 베트남 남부 띠엔장
결과 떠이선군의 결정적 승리
교전국
떠이선군 시암
응우옌아인
지휘관
응우옌후에 찌에우땅
찌에우스엉[nb 1]
쩌우반띠엡
병력
2만 명 가량으로 추정 시암군 2만-5만 명[1]
시암군 전함 300여 척[1]
응우옌아인의 병력
피해 규모
미상 거의 전멸[1][2][3]

락검-쏘아이뭇 전투(베트남어: Trận Rạch Gầm – Xoài Mút)는 베트남떠이선군과 시암-응우옌아인 연합군 간에 1785년 1월 19일 현재 띠엔장으로 불리는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이는 베트남이 참전한 국제전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 중 하나로 베트남의 전사(戰史)에 남아 있다.

배경[편집]

1783년 떠이선 반란군은 사이공을 다시 접수하였고, 이에 응우옌아인은 시암으로 망명하였다. 응우옌아인은 망명 중에 자딘을 수복하고 떠이선 반란군을 몰아내기를 희망하였고, 아인의 장군 쩌우반띠엡은 시암의 왕 라마 1세에게 병력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1784년 중반 응우옌아인은 2만-5만 명의 시암군과 300척의 시암 전함[1]을 이끌고 캄보디아똔레삽 호의 동쪽 방면을 통과해 안남의 최근 합병지를 지났다. 2만 명의 시암군은 끼엔장에 도달하고 나머지 3만여 명은 짭랍에 상륙하여 껀터를 향해 진격해 갔다. 1784년 말 시암군은 자딘의 전 캄보디아 영토를 점령하고 월족 정착민에게 잔혹 행위를 저질렀는데, 이로 인해 현지인들이 떠이선을 지지하게 되었다.[1]

전황[편집]

응우옌후에가 이끄는 떠이선군은 꾸이년에서부터 남쪽으로 행군하여 곧 코친차이나 지역에 도착하였다. 응우옌후에는 사덱의 강력한 시암군에 대한 직접 공격을 피하고 함정을 설치하고자 했다.[1] 시암군의 기동을 예측한 응우옌후에는 은밀하게 보병과 포병을 메콩 강 연안(현재 띠엔장의 락검-쏘아이뭇 지역)과 강 중앙의 일부 섬에 배치하여 북쪽 강둑의 다른 부대와 마주보게 했고, 이렇게 배치된 양측 보병 병력이 수군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1]

1785년 1월 19일 아침, 응우옌후에는 휴전기(休戰旗)를 내건 약간의 수군 병력을 보내 시암군을 함정으로 유인했다. 계속된 승리로 시암군은 자신만만해 있었고,[3] 교섭을 위해 함정을 모르는 채로 나아갔다. 이때 응우옌후에의 전함이 무대비 상태의 시암 병력을 향해 신속하게 달려들어 시암군을 진퇴양난에 빠뜨렸다. 그사이 떠이선의 포병대는 포격을 시작했다.[4]

전투 결과 시암군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베트남 측 자료에 의하면, 시암 측의 모든 전함이 파괴되었고 시암 원정군 중 2-3천 명만이 살아서 메콩 강을 건너 시암으로 도망쳤다고 한다.[4] 응우옌아인과 식솔들은 도망쳐 나중에 시암으로 갔다.[4]

주석[편집]

각주
  1. 베트남측 표기.
인용
  1. Tucker, Spencer (1999). Vietnam. Lexington: 켄터키 대학 출판부, 15쪽, ISBN 0-8131-0966-3.
  2. Clodfelter, Michael (1995). 《Vietnam in Military Statistics: A History of the Indochina Wars, 1772-1991》. McFarland & Company, 7쪽. ISBN 0786400277. 7쪽, ISBN 0-7864-0027-7.
  3. Dutton, George Edson (2006). 《The Tây Sơn uprising: society and rebellion in eighteenth-century Vietnam》. 하와이 대학 출판부, 45–46쪽. ISBN 0824829840.
  4. Tucker, 16쪽.

좌표: 북위 10° 20′ 20″ 동경 106° 19′ 30″ / 북위 10.33889° 동경 106.32500° / 10.33889; 106.32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