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팅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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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팅겐 전투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일부)
데팅겐 전투에서의 조지 2세
데팅겐 전투에서의 조지 2세
날짜 1743년 6월 27일
장소 바바리아데팅겐
결과 동맹군 승리
교전국
Union flag 1606 (Kings Colors).svg그레이트브리튼 왕국
하노버 선제후령
Banner of the Holy Roman Emperor (after 1400).svg신성로마제국[1] 오스트리아
Pavillon royal de France.svg[2]프랑스
지휘관
Union flag 1606 (Kings Colors).svg조지 2세
Union flag 1606 (Kings Colors).svg스테어 백작
Banner of the Holy Roman Emperor (after 1400).svg아렌베르크 공작
Banner of the Holy Roman Emperor (after 1400).svg나이페르크 육군원수
Pavillon royal de France.svg노아유 공작
Pavillon royal de France.svg그라몽 공작
병력
35,000-37,000명:[3]

14 오스트리아 보병대대(battalions)
10 오스트리아 기병대대(Squadrons)

13 하노버 보병대대
16 하노버 기병대대

15 브리튼 보병대대
18 브리튼 기병대대

대포 98문
45,000명 중 23,000명 사용[4]

5 보병여단
27 기병대대

대포 56문
피해 규모
2,000 - 3,000명[5] 5,000 - 6,000명[5]

데팅겐 전투(독일어: Schlacht bei Dettingen)는 1743년 7월 27일[6]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기간에 바바리아데팅겐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는 영국과 하노버의 군주 조지 2세(George II)가 친히 자신의 군대를 이끈 마지막 전투이다. 영국군은 하노버(Hanover), 헤센(Hesse)과 동맹을 맺고 노아유 공작(duc de Noailles) 휘하의 프랑스 군과 싸워 격파하였으나 아직 프랑스와 영국 모두 전쟁의 승리를 선언할 상황은 아니었다.

서막[편집]

동맹군은 국본군(Pragmatic Army)으로 불렸는데, 왜냐하면 이 군대는 마리아 테레지아(Maria-Theresa)를 신성로마제국의 여제로 인정하는 1713년의 국사조칙(Pragmatic Sanction of 1713)을 지지하는 연합국들이 구성한 군대이기 때문이다.

스테어 백작 존 달림플(John Dalrymple, 2nd Earl of Stair)이 지휘하는 16,000명의 영국군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 있는 오스텐트(Ostend,오스탕드)에 1742년 7월 10일 상륙하였다. 여기서 국본군이 조직되어 44,000명의 병력이 전역(campaign)을 개시하였는데, 이중에는 16,000명의 하노버 병력과 오스트리아, 헤센, 네덜란드의 병력이 비슷한 규모로 참가하고 있었다.[7]

이들은 1743년까지 행동을 하지 않았다. 영국 왕 조지 2세가 달림플에게 독일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헤센과 오스트리아군은 네덜란드를 보호하기 위해 떠났다. 네덜란드 내부의 의견차이로 인하여 20,000명에 달하는 네덜란드군은 이 전역에 너무 늦게 참여하게 되었다.[8]

오스트리아군 사령관 아렌베르크 공작네카어강을 따라 바바리아를 향해 진군하자고 제안했으나 영국왕 조지 2세는 프로이센이 하노버를 공격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모든 선택을 열어둔 채, 마인 강의 북안을 따라 진군하기로 결심했다.

7월 17일 연합군은 클라인오스트하임(Kleinostheim)과 아샤펜부르크(Aschaffenburg) 사이에 진영을 설치했다. 조지 2세는 25개의 영국 기병대대와 하노버 기병대대들과 함께 출진하여 7월 19일 본대와 합류하였고, 전군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7월 27일 프랑스군이 연합군의 보급선을 끊자 국본군은 식량부족으로 고생하게 되어 상태가 악화되었기에 프랑스가 노리고 있던 하나우(Hanau)를 공략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는 노아유가 지휘하는 45,000명의 프랑스군이 연합군을 교묘히 교란한 결과였다.

전투[편집]

7월 27일 국본군은 마인강의 북안을 따라 아샤펜부르크의 서쪽으로 진군하여 데팅겐 마을에 설치된 노아유 군대의 함정에 걸려들었다. 마인 강이 흐르는 여울 뒤에 노아유는 그라몽 공작(Duc of Gramont)에게 23,000명의 병력을 주어 데팅겐에서 폴바흐 지류(Forbach creek) 뒤에 있는 슈페사르트 고지대(Spessart Heights)로 나아가는 길목을 봉쇄하게 하였다. 그와 동시에 마인 강 남안에 포병대를 배치하여 적의 견제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국본군의 좌측을 공격할 수 있게 하였으며, 약 12,000명의 프랑스군에게 아샤펜부르크 남쪽으로 진군하여 마인 강을 건너 동맹군의 후방을 찌르게 하였다. 국본군의 우익은 수풀이 우거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동맹군이 그라몽이 있는 방향으로 전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거의 6시간 동안 영국, 오스트리아, 하노버 연합군은 이 견고한 포진을 돌파하고자 하였다. 어느 한 지점에서 조지 2세의 말이 조지 2세를 떨어트리려 하였다. 소위 키루스 트라파우드가 조지 2세의 낙마를 저지했고, 그는 상으로 승진을 하게 되었다.[9] 결국 명령에 반하여 그라몽 공작은 인내심을 잃고 메종 드 루아(Maison du Roi) 기병대에게 명하여 동맹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처음에 이 공격은 성공을 거두어 영국군의 선봉대를 붕괴시키고 영국군 기병대와 보병들을 돌파하여 여러 개의 군기를 포획하였다.[10] 곧 프랑스 보병대가 뒤따랐다. 그렇지만 이 기병대대의 돌격은 프랑스 포병대의 포격을 중단시켰고, 프랑스 보병대의 공격시 적의 방어를 무력화 시킬 수 없어, 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 3개 부대의 연대들은 영국군이 퇴각하여 생긴 공간에 침투하여 프랑스 보병대의 측면에 돌격을 감행하였고,[11] 하노버 군이 프랑스군에 포격을 가하여 이를 지원하였다. 프랑스군의 전열은 붕괴되었다.[12] 동맹군은 그라몽 공작의 군대를 강으로 몰아넣어 물리치고 하나우로 가는 길을 열러 동맹군의 퇴로와 보급로를 회복하였다.

데팅겐 전투도

양군은 전투 중에 다치거나 부상을 입어 적의 손에 넘어간 병사들을 보살피고 전쟁포로로 대우하지 않고 잘 대해주어야 한다고 합의하였다. 동맹군이 퇴각했을 때, 이들은 많은 부상병들을 남겼고 프랑스군은 협정을 존중하여 제노바 협정의 선구자가 되었다.

영향[편집]

프랑스군이 데팅겐에서 패하자 노아유는 프랑스군이 유리한 상황에서 전쟁을 승리를 이끌 가장 좋은 기회를 놓쳐버렸다. 만약 프랑스 군이 국본군을 밀어붙여 조지 2세를 포위하거나 몰아넣기만 했더라도 영국왕은 루이 15세의 포로가 되었을 것이다.

인용[편집]

왕립 스카우트 퓨질리어 보병(Royal Scots Fusilier)

전투 중에 부사령관 앤드류 애그뉴 경(Sir Andrew Agnew)은 자신의 휘하 로얄 스카우트 퓨질리어 보병연대의 병사들에게 "적군의 흰자를 볼 때까지 사격을 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13] 기지를 발휘하여 앤드류경은 그의 연대 병사들에게 "제군들, 제군들은 저기 있는 젊은이들이 제군들을 죽이기 전에 저들을 죽이는게 나을 것일세!"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조지 2세는 전투 이후에 프랑스 기병대의 돌격에 돌파당한 자신의 연대원들을 농담 삼아 꾸짖으며 "비록 그들이 나를 경애할지언정, 다시는 오게 하지 말게나"라고 말하였다.

유산[편집]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음악가 헨델은 데팅겐 테 데움과 데팅겐 안템을 작곡하였다.

데팅겐은 1947년 영국 육군사관학교의 훈련부대 이름이 되었다. 덧붙여 윈체스터에 있는 4육군훈련연대의 이름이 데팅겐이다.

주석[편집]

  1. 1911 Encyclopedia Britannica, entry National Flags: "The Austrian imperial standard has, on a yellow ground, the black double-headed eagle, on the breast and wings of which are imposed shields bearing the arms of the provinces of the empire . The flag is bordered all round, the border being composed of equal-sided triangles with their apices alternately inwards and outwards, those with their apices pointing inwards being alternately yellow and white, the others alternately scarlet and black ." Also, Whitney Smith, Flags through the ages and across the world, McGraw-Hill, England, 1975 ISBN 0-07-059093-1, pp.114 - 119, "The imperial banner was a golden yellow cloth...bearing a black eagle...The double-headed eagle was finally established by Sigismund as regent...".
  2. George Ripley, Charles Anderson Dana, The American Cyclopaedia, New York, 1874, p. 250, "...the standard of France was white, sprinkled with golden fleur de lis...". *[1] The original Banner of France was strewn with fleurs-de-lis. *[2]:on the reverse of this plate it says: "Le pavillon royal était véritablement le drapeau national au dix-huitième siecle...Vue du chateau d'arrière d'un vaisseau de guerre de haut rang portant le pavillon royal (blanc, avec les armes de France)."
  3. Chandler, David. The Art of Warfare in the Age of Marlborough. Spellmount Limited, (1990): ISBN 0-946771-42-1, p.306: Some statistics taken from Chandler
  4. Hamilton, Lieutenant-General F.W..Origin and History of the First or Grenadier Guards, London, 1874, Vol. II, p.109, gives French under Grammont at 20,000 in 5 Brigades.
  5. Hamilton, Lieutenant-General F.W..Origin and History of the First or Grenadier Guards, London, 1874, Vol. II, p.111
  6. Many British sources from the time have the date as June 16th instead of June 27 according to the Gregorian calendar, which the British had not yet officially adopted)
  7. Edward E. Morris, The Early Hanoverians, London, 1886, pp.123- 127.
  8. See DBNL. De Gids Jaargang 1885 (in Dutch), p.300.
  9. Duffy, Christopher The Military Experience in the Age of Reason, 1998, Wordsworth Editions Ltd., Hertfordshire, ISBN 1-85326-690-6, p. 19, "the Comte de Stainville(later Duc de Choiseul) three times heard Marshall Noailles order the army to reoccupy the position...".
  10. Morris, Edward Ellis.The Early Hanoverians, London, 1886, p.126, of the Maison du Roi cavalry: "The charge came with such force that it broke, at least in parts, the three front lines of the English, but could not break the fourth."
  11. Robert Wright, The Life of Major-General James Wolfe, London, 1864, pp. 44-45.
  12. Daniel Mackinnon, Origin and services of the Coldstream Guards, London 1883, Vol.1, p. 358
  13. See quote from The Times

참조[편집]

  • Chandler, David. The Art of Warfare in the Age of Marlborough. Spellmount Limited, (1990): ISBN 0-946771-42-1
  • Browning, Reed.The 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 St. Martin's Press, New York, (1993): ISBN 0-312-12561-5
  • Hamilton, Lieutenant-General F.W..Origin and History of the First or Grenadier Guards, London, 1874, Vol. II.
  • Mackinnon, Daniel. Origin and services of the Coldstream Guards, London 1883, Vol.1.
  • Morris, Edward Ellis.The Early Hanoverians, London, 1886.
  • Wright, Robert, The Life of Major-General James Wolfe, London 1864.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