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라우치 히사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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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히사이치
1879년 8월 8일 - 1946년 6월 12일
TerauchiH.jpg
남방총군 사령관 데라우치 히사이치
태어난 곳 일본, 야마구치 현
죽은 곳 말라야
복무 일본 제국 육군 군기 일본제국 육군
복무 기간 1900년 ~ 1945년
최종 계급 元帥徽章.svg 원수
주요 참전 러일 전쟁
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데라우치 히사이치 (일본어: 寺内 寿一, 1879년 8월 8일 ~ 1946년 6월 12일) 는 일본 제국 육군 원수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일본군 남방총군의 총사령관이었다.

생애[편집]

데라우치는 1879년, 일본야마구치 현에서 후에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그는 190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11기로 졸업하고, 러일 전쟁에 참전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데라우치는 일본 육군대학교로 돌아와 1909년에 21기로 졸업하였다. 그는 독일에서 주재무관을 지냈으며,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선 강사로 일했다.

그는 1919년, 화족 작위 체제 하에 하쿠샤쿠(백작) 작위를 받았고, 군에서의 계급은 대령으로 높여졌다. 1924년, 데라우치는 소장으로 승진하였고, 1926년 9월에는 산요 본선 탈선 사고가 일어나 34명이 사망했지만, 데라우치는 부상을 입지 않았다.

데라우치는 1927년, 당시 한국 주둔 중이었던 조선군의 참모장이 되었다. 그는 1929년, 중장으로 승진한 뒤에 1932년에는 일본 제국 육군 제4사단을 떠나 일본 제국 육군 제5사단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1934년에는 타이완 주둔군의 지휘관이 되었다.

1935년 10월, 데라우치는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였고, 군의 정치 파벌 황도파(皇道派)와 연루되기도 하였다. 또한 1936년, 2.26 사건 후에 데라우치가 육군 대신으로 임명되자 일본 국회의 민간 정치 세력과 군 정치 세력간에 갈등이 심화되었다.[2] 데라우치는 나중에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 와해 후 후계 내각총리대신으로 주목받기도 했는데, 남방군 총사령관의 역할로 전선에서 벗어날 수 없는 바람에 조선 총독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였다.

데라우치는 중일 전쟁 발발 후에 즉시 북지나 방면군의 지휘 임무를 위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1938년에 일급 훈장인 욱일장을 수상했으며, 1941년 11월 6일에는 남방군의 지휘를 위해 이동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는 태평양 전쟁을 위하여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와 함께 전쟁 계획을 고안하였다.

데라우치는 동남아시아 정복을 이끈 후, 싱가포르에 자신의 본부를 설치하였고 1943년 6월 6일, 육군 원수로 승진하였다. 1944년 5월, 그는 필리핀으로 이동하였으며, 이 지역이 위험에 처했을 때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사이공으로 후퇴하였다. 그는 버마에서 일본의 패배를 전해 들었고, 1945년 5월 10일뇌경색을 겪었다.

데라우치는 1945년 9월 30일, 직접 영국루이스 마운트배튼에게 항복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 영국령 말라야에 위치한 포로 수용소에서 뇌경색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무덤은 싱가포르에 위치한 일식 공원 묘지에 있다.

일본 국회에서의 히로타 고키와 데라우치 히사이치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내일을 여는 역사 15호》172쪽
  2. 《히로히토:신화의 뒤편》 217쪽

바깥 고리[편집]

전 임
가와시마 요시유키
일본 육군대신
1936년 - 1937년
후 임
나카무라 고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