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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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영화(大韓民國- 映畵)는 대한민국 국적자 혹은 법인에 의해 제작된 영화로서 주로, 한국인 스탭과 배우로 구성된 영화를 지칭한다. 대한민국의 영화는 일제 강점기의 영화에 기원하며, 예술과 산업으로서 다양한 종류와 내용의 영화가 매년 제작되고 있다.

역사[편집]

광복 이후[편집]

일제강점기 후반부에는 검열과 동원으로 영화 제작이 어려웠다. 광복이 되자 영화인들은 거의 맨주먹으로 다시금 재기하기에 안간힘을 썼다. 이 당시의 영화는 광복의 감격을 표현한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최인규 감독이 전창근을 주연으로 해서 만든 《자유만세》, 윤봉춘 감독의 《안중근 사기(安重根史記)》, 이규환 감독의 《똘똘이의 모험》을 비롯하여 《3·1혁명기》·《해방된 내 고향》 등이 1946년에 제작되었으며, 다음해에도 민족의 고난과 독립투쟁을 말하는 《윤봉길 의사》·《불멸의 밀사》·《민족의 절규》 등 많은 작품을 내놓았다.그러나 한국의 영화가 그 예술적인 면에서 크게 진전을 본 것은 1960년 이후의 일이었다. 초창기로부터 해방 당시까지 그 의욕은 왕성했지만 예술적인 차원에서는 아직도 미숙했었다.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영화인들은 민족의 고뇌와 분노를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데 영화를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한 예가 오히려 많았다고 주장되기도 한다.[1]

텔레비전 보급 이후[편집]

영화를 제작하는 기업은 영세하고 시장은 협소하여 외화와 같이 영화제작에 충분한 시간과 경비를 투입할 수 없었고, 또한 자본주인 흥행사의 간섭 등으로 의욕있는 작품을 제작되기에는 어려운 여건에 놓여 있었다. 이와 같이 침체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정부에서도 영화산업의 보호 육성책으로 1971년 2월에 영화진흥조합을 발족시켜 방화제작비 융자, 시나리오 창작금 지원, 영화인 복지사업 등을 추진하게 되었다.

1980년대 초에는 텔레비전 보급과 레저 산업의 성장에 의해 영화가 지녔던 대중 오락적 기능은 상대적으로 감소되어 영화산업이 사양화하고 있었지만 1986년 영화법 개정 이후 영화제작자유화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89년 제작된 방화는 1980년대 들어 가장 많은 106편에 달했다. 실제로 1989년은 방화가 물량면에서는 1980년대 들어 최다제작이 이루어졌으나 외화직배문제로 외화수입물량이 폭증하여 방화가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고, 관객의 방화외면, 외화의 선호현상이 더욱 심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외화는 방화보다도 많은 관객을 확보하고 있었다. 1980년대의 한국 영화계의 불황은 텔레비전 보급과 레저산업의 성장이라는 외적인 면보다는 내적인 면에 더 큰 원인이 있었고, 사회적·경제적·기술적인 제반 여건이 충족되지 않은 비정상적인 출발이 한국 영화를 산업으로 성장시키지 못하고 소규모의 기업에 머물게 하였다.[2]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한국의 영화', 《글로벌 세계 대백과》
  2. '영화산업의 현상', 《글로벌 세계 대백과》

참고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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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