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스기 신사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다카스기 신사쿠
1839년 9월 12일 ~ 1867년 5월 17일
Shinsaku Takasugi.jpg
다카스기 신사쿠
태어난 곳 나가토 국
죽은 곳 나가토 국
별명 도우교우(東行)
복무 에도 막부 말기

다카스기 신사쿠 (高杉晋作, 1839년 9월 12일 ~ 1867년 5월 17일) 는 메이지 유신에 크게 기여한 조슈 번의 사무라이이다. 그는 종종 다니 우메노스케(谷梅之助) 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도쿠가와 막부의 눈을 피해 활동하였다.

초기 이력[편집]

다카스기는 조슈 번 (현재의 야마구치 현 ) 하기 시에서 중류계급의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났다. 다카스기는 어렸을때 번교였던 메이론칸(明倫館)에서 한학을 배우고, 이후 요시다 쇼인이 세운 사립학교인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공부하였다. 이후 다카스기는 요시다의 가장 총애하는 제자가 되었다. 1858년 다카스기는 막부의 군사교육 기관인 쇼헤이코에 들어갔다. 그러나 번의 명령으로 1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다카스기는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번에서 영향력 있는 인사였는데, 당시 그는 양이운동의 선봉에 서서 극단적으로 서양 세력의 배척을 주장하였다. 1862년 다카스기는 에도에서 영국 공사관을 방화하기도 하였다.

해외 탐방[편집]

1862년 다카스기는 서양 열강의 사정을 알기 위해 청나라의 상하이를 방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중국은 태평천국운동이 한창이었는데, 다카스기는 그곳에서 유럽 제국주의의 횡포를 보고 크게 놀랐다. 다카스기는 일본으로 돌아와 중국과 같은 수난을 겪지 않으려면, 국력을 키워 서양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존왕양이 운동의 논리가 되었고, 조슈 번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쇼타이와 기병대의 설립[편집]

다카스기 신사쿠는 조슈 번의 근대적 군대를 창설했다. 이 군대는 제1차, 제2차 조슈 정벌과 보신전쟁에서 막부군과 싸운 존왕파의 주된 무력이었다.

다카스기는 처음에 일종의 민병대인 쇼타이(諸隊)를 설립하였다. 봉건제 하에서 전쟁은 오직 사무라이 계급의 독점물이었으나, 다카스기는 이를 타파하고 모든 국민이 국가의 부름에 전쟁에 나서는 국민국가적인 군대를 구상한 것이다. 그리하여 농민, 상인, 공인, 스모 선수, 심지어는 불교 승려까지도 쇼타이에 가입시켰다. 다카스기는 이런 방안을 통해 번의 재정지출을 억제하면서도 전력을 증강시키려고 하였다. 1863년 다카스기는 특수한 쇼타이 부대를 만들고, 이를 기헤이타이(奇兵隊)라고 불렀다. 기헤이타이는 3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중 반은 사무라이 출신이었다.

1863년 다카스기는 교토에서 반조슈 쿠데타가 일어난 이후 여파가 미칠 것을 두려워한 조슈 번의 관리들에 의해 구금되었다.

막부체제의 동요[편집]

조슈 번은 시모노세키 앞바다의 서양 군함을 공격했다가 서양 세력의 반격으로 도리어 시모노세키가 포격당했다. 이후 프랑스 해군 육전대가 상륙하여 이에 맞서 조슈번의 사무라이들이 맞싸웠으나 패퇴하고 말았다. 이후 번의 군사력이 열세임을 깨달은 조슈 번은 다카스기를 석방시켜 서양세력과의 평화교섭을 맡기는 동시에 번 군사감독으로 번 군제를 개혁하도록 하였다. 그때 다카스기의 나이는 겨우 25살이었다.

다카스기는 이렇게 침락해 오는 서구 열강을 바로 맞서는 것은 무모하다고 생각하고, 서구 열강의 군사기술을 습득한 후 맞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다카스기는 기헤이타이를 최신식 소총를 갖춘 부대로 개편하였다. 또한 서구 배척에 중점을 둔 존왕양이 운동의 방향을 막부 타도로 변경하였다.

막부는 조슈 번이 교토를 점거한 것을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 조슈 번을 침공했다. 조슈 번은 서양세력에 의해 군사력이 붕괴되었기 때문에, 막부의 원정군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조슈 번은 막부와 타협하기 위해 다카스기를 번에서 내보냈다. 다카스기는 추종자 10여명을 데리고 (이들 중 훗날 일본의 지도자가 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도 끼어있었다) 규슈로 갔다. 여기에서 다카스기는 조슈에 주둔한 막부군을 타도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이후 1865년 1월 13일 다시 이들과 막부군이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막부군 격파[편집]

3월에 다카스기는 그동안 키워온 기헤이타이를 동원하여 사무라이로만 이루어진 막부군을 격파하였다. 이 승리로 그는 조슈 번의 주된 정치, 군사 지도자가 되었다. 다음해 막부는 다시 군대를 보내어 조슈를 정벌하려고 하지만, 다카스기가 지휘하는 조슈 번의 병력은 이를 다시 격파하였다. (제2차 조슈 정벌). 이 패배로 막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이것을 본 사쓰마 번은, 그동안 반목했던 조슈와 손을 잡고 막부 타도에 힘을 보태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켰다.

죽음[편집]

그러나 다카스기는 이러한 성공을 보지 못하고 1867년 5월 17일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이때 나이 겨우 28세였다. 이후 기헤이타이는 그의 부하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지휘하였고, 1868년, 다카스기의 꿈인 막부 타도가 이루어졌다. 신정부가 수립되고, 일본 제국 육군이 설립됨에 따라 1870년 기헤이타이는 해체되었다.

유산[편집]

다카스기 신사쿠는 메이지 유신 초기의 주역이었다. 그러나 사카모토 료마와 비슷하게 성공을 앞두고 요절하는 바람에 이후 신정부의 지도자가 되지는 못하였다. 반면 그의 부하였던 야마가타와 이토, 기도 다카요시 등은 이후 신정부에서 수상 등의 고위직에 진출하였다. 그의 고향인 하기 시에서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