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집 (18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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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 (1842년)
출생 1842년
대한제국 조선 경상도 경주
사망 1896년 2월 11일
대한제국 대한제국 조선 서울
사인 타살
국적 대한제국 조선
학력 1868년 알성문과 급제
직업 한말의 문신,총리대신
부모 김영작(金永爵)/ 창녕성씨(昌寧成氏)

김홍집(金弘集, 1842년 ~ 1896년 2월 11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정치가이다. 자는 경능(敬能), 호는 도원(道園)·이정학재(以政學齋), 시호는 충헌(忠獻), 본관은 경주이다.

원래 이름은 김홍집(金弘集)이었으나, 청나라 고종(高宗)의 휘가 ‘홍력’(弘歷)이었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 김굉집(金宏集)으로 가운데 자(字)를 바꾸었다.[1]

목차

[편집] 생애

[편집] 생애 초기

1868년(고종 5년)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광양 현감을 거쳐서 1880년 예조 참의로서 제2차 수신사로 임명되어 58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 제국을 다녀와서, 서양 근대의 기술적 성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일본의 문물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조사시찰단의 일본 파견을 상주하게 하였다.

[편집] 일본 유람

김홍집 일행은 1880년 7월 일본 기선 〈치토세 호〉 편으로 부산항을 통해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 체재 1개월 동안 이들은 일본 정부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일본의 근대화된 모습을 두루 살폈다. 그런 한편 일본의 감언이설과 유혹에 빠져들어 친일파로 변신하게 되었다. 이들은 수신사 본래의 사명을 망각하고 일본 정부가 줄기차게 요구해온 바, 인천을 개항장으로 지정토록 하고, 일본 공사의 한성부 주재 등이 필요하다고 본국 정부에 품신하는 등 일본의 주구 노릇을 하기에 이르렀다.[2]

[편집] 귀국과 정치 활동

김홍집은 귀국한 뒤 중국인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을 소개하여 개화 정책을 적극 추진케 한 공으로 예조 참판에 승진했으나, 개화를 반대하는 유학자들의 배척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책을 소개한 책임을 지고 사직했다.

그밖에 1882년 구미 열강의 통상 요구와 임오군란의 뒤처리 등 복잡한 문제에 부딪친 조선 정부에 다시 기용되었다. 전권대신 이유원(李裕元)의 부관으로서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맺는 데 앞장서는 등 여러 나라와 수호조약(한미(韓美)·한영(韓英)·한독(韓獨) 등) 등을 맺을 때 유효적절한 수완을 발휘하여 ‘비오는 날의 나막신’에 비유되곤 하였다.[3] 여러 조약을 잘 처리한 공으로 경기도 관찰사로 승진되었다.

1884년 예조 판서·한성부 판윤을 역임하였고,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우의정, 좌의정 등으로 전권대신이 되어 한성 조약을 체결한 뒤에 사임하였으며, 판중추부사로 한때 한직에 머물러 있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조선에의 침투를 바란 일본군은 청일 전쟁을 일으키기 며칠 전인 음력 6월 21일(양력 7월 23일)에 경복궁을 습격하고 무기고를 탈취하는 등 김홍집 일파를 지원하였다. 이에 따라 김홍집은 음력 6월 말부터 제1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하고 총리대신이 되어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청일 전쟁의 결과 일본이 득세하자 강력한 친일파가 입각한 제2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으며, 이때 홍범 14조를 발표하는 등 개혁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재정난과 박영효·서광범 등 극단적 친일파와의 대립으로 내각은 와해되고 박정양 내각이 탄생하였다.

박정양 내각이 새로 세력을 뻗기 시작한 구미 열강에 친근하려는 정책으로 기울어지자 일본 제국은 1895년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죽인 후 제3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하였다. 김홍집 내각에서는 일본의 압력으로 단발령 등 급격한 친일적 개혁을 실시하다가 전국적인 의병 항쟁을 유발시켰으며, 1896년(건양 1년) 러시아의 세력이 증대하여 드디어 아관파천이 일어나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고 친러파 내각이 조직되었다. 그와 동시에 김홍집은 많은 대신이 피살될 때 매국 친일당의 두목으로 몰려 광화문에서 군중에게 살해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총리대신으로서 정권을 도맡아 친일 내각을 조직하고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 圭介)의 지휘를 받으면서 조선 왕조를 강탈하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업무를 시작했다.

[편집] 친일 의혹

일설에는 김홍집은 자신이 군국기무처의 총재를 겸임하면서 총재보좌 명목으로 일본 공사관 직원 4~5명을 끌어들여 이들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등 친일매국행위에 앞장섰다[4]는 주장도 있다.

[편집] 평가

김홍집은 행실이 그가 주장한 바와 엇갈리는 바가 많아서 ‘친일파 애국자’로 표현되곤 한다.[3]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조선을 개혁하려 했던 정치가라는 평가와 함께 일본에 이용당한 친일파라는 평가가 공존한다. 또한 그가 죽기에 앞서 “일국의 총리로 동족 손에 죽는 것은 천명”이라는 말을 남겼기 때문에 책임감 있는 정치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편집] 함께 보기

[편집] 김홍집을 연기한 배우

[편집] 참고 자료

[편집] 주석

  1. 정교(鄭喬) 저, 조광(趙珖) 편, 《대한계년사 1》(소명출판, 2004년) 93쪽.
  2. 김삼웅 (1995년 7월 1일). 《친일정치 100년사》. 서울: 동풍. ISBN 9788986072037
  3. 임종국 (1991년 2월 1일).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서울: 돌베개, 66~67쪽쪽. ISBN 8971990368
  4. 김삼웅 (1995년 7월 1일). 《친일정치 100년사》. 서울: 동풍. ISBN 978898607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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