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식 (1947년)
| 김인식 Kim Yin-Si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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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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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적 | |
| 출신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1] |
| 생년월일 | 1947년 5월 1일 (65세) |
| 신장 | 176 cm |
| 체중 | 78 kg |
| 선수 정보 | |
| 투구·타석 | 우투우타 |
| 수비 위치 | 투수 |
| 프로 입단 연도 | 1986년 (해태 타이거즈 수석코치) |
| 연봉 | 3억 5천만원(2008년) |
| 경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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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경력 코치 경력
감독 경력
국가대표팀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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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식(金寅植, 1947년 5월 1일 ~ )은 전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이자, 전 한국 프로 야구 감독이다.
실업 야구 팀 한일은행에서 투수로 뛰던 중 어깨 부상을 당해 일찍 은퇴하고 배문고등학교, 상문고등학교, 동국대학교 감독을 맡은 후, 1986년 해태 타이거즈 수석 코치로 프로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어 1990년에 쌍방울 레이더스의 창단 감독으로 프로 감독도 시작했다. 1994년 선수단 집단 이탈 사건으로 사임한 윤동균의 후임으로 1995년 OB 베어스의 사령탑을 맡아 1995년과 2001년 팀을 두 차례나 한국 시리즈 정상에 올려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한화 이글스의 감독을 맡았고 2010년까지 한화 이글스의 고문을 맡았다.
2002년 아시안 게임에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금메달을 따냈다.
1991년 ~ 92년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으로 93승 155패 4무, 95년 ~ 2003년 두산(OB)에서 579승 556패 33무, 이어 2005년 6월 한화에서 28승을 추가해 통산 700승을 기록했다.
선수들을 믿고 밀어붙이는 믿음의 야구를 한다고 알려져 있다.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4강 진출이라는 좋은 성적을 냈으며, 같은 해 한화 이글스도 한국 시리즈 준우승으로 이끄는 뛰어난 지도력을 보였다. 시즌 종료 후 한화 이글스와 역대 감독 최고액인 계약금, 연봉 각 3억 5천만 원, 총액 14억 원에 3년 재계약을 했다.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이후 다시는 국가 대표팀 감독을 맡지 않겠다고 언급했으나, 2008년 하계 올림픽 금메달 이후 감독 선임에서 잡음이 크게 일었던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표팀 감독을 다시 맡아 대한민국 대표팀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목차 |
[편집] 선수 경력
[편집] 지도자 경력
- 1973년 - 1977년 배문고등학교 감독
- 1978년 - 1980년 상문고등학교 감독
- 1982년 - 1985년 동국대학교 감독
- 1986년 - 1989년 해태 타이거즈 수석 코치
- 1990년 - 1992년 쌍방울 레이더스 창단 감독
- 1994년 9월 - 2003년 OB 베어스 감독
- 1995년 - 한국 시리즈 우승 (OB 베어스)
- 2001년 - 한국 시리즈 우승 (두산 베어스)
- 2005년 - 2009년 한화 이글스 감독
- 2010년 - 한화 이글스 고문, 천하무적야구단 총감독
[편집] 국가대표팀 경력
- 2002년 - 2002년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팀 감독 (금메달)
- 2006년 -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표팀 감독(4강)
- 2009년 -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표팀 감독(준우승)
[편집] 기록
- 2000년 두산 베어스 감독으로 10연승 기록 (6월 16일 현대전 - 6월 27일 현대전까지)
- 2005년 6월 11일 - 프로야구 감독 통산 700승 (다섯번 째, 소속: 한화 이글스, 상대팀: LG, 점수: 1-3)
[편집] 김인식에 대한 비판
두산에서 보여준 2회 우승이나 각종 국제 대회에서 국가 대표팀 사령탑 역할로 대체적으로 팀을 잘 이끌어 가지만 비판의 여론도 적지 않다. 비판의 여론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김인식 감독이 부임하는 팀의 공통점은 상대적으로 노장인 선수들이 주전을 꿰차고, 신인 선수들은 1 ~ 2명을 제외하고 벤치 멤버 혹은 2군 멤버로 고정된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게다가 신참들 중 일부는 무리한 스케줄로 인한 과부하에 시달린다는 비판 역시 존재하는데, 2005년의 윤규진[2], 2007년의 안영명, 2008년의 마정길, 2009년의 양훈, 황재규를 예로 들 수 있다.[3]
실제로 2009년 한국 프로 야구 시즌 동안 한화의 주전 투수 가운데 5년 이하의 신인 선수는 류현진, 유원상 정도에 불과하며 대부분 나이가 30대 이상의 선수들로 구성되었고 심지어는 40대 이상인 송진우, 구대성까지 주전 엔트리에 들어갔다. 그로 인해 몇몇 신진 선수들은 군 문제라는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 결과는 한화 이글스의 팀 리빌딩 실패와 함께 2009년에 최하위로 밀리고 류현진을 제외한 선발 투수진들이 이듬해 한대화 감독 재임 첫 해에 급격히 약화된 것이다. 2009년 시즌 중 송진우와 정민철은 부진 끝에 현역에서 은퇴하였고, 문동환은 방출당하는 등 다이너마이트 타선이라는 별칭의 타격진들과 달리 투수진에서 이러한 현상이 짙었다. 한대화 감독 재임 이후 박정진, 최진행, 안승민 등의 선수들이 부상하기 시작한 것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편집] 에피소드
2003년까지 9시즌 동안 해온 두산 베어스 감독직을 사퇴한 직후인 2004년 12월 9일, 돌연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이후 뇌경색이 회복되며 그 흔적마저 사라지자 의학계에서는 기적이라며 학계에 보고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는 뜻을 본인에게 전달하였다. 일반적으로는 뇌경색 발병 이후 완치되어도 혈관이 막혀 죽은 뇌세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죽은 뇌세포가 완전히 사라지는 경우는 학계에서는 아직 한 차례의 보고도 없었다. 하지만 뇌경색의 영향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한 상태이다.
[편집] 참조
- ↑ 프로야구 두산 前 감독 김인식 《한국일보》, 2003년 10월 15일 작성
- ↑ 2005년 시즌의 너무 잦은 등판에 팔꿈치 부상을 당하고, 2006년 일본에서 토미 존 서저리 수술을 받았다.
- ↑ "2009 팀별정리" - 한화 이글스 - 최훈 프로야구 카툰
[편집] 바깥 고리
| 전 임 유승안 |
제7대 한화 이글스 감독 2004년 10월 7일 ~ 2009년 9월 24일 |
후 임 한대화 |
| 전 임 윤동균 |
제6대 두산 베어스 감독 1994년 9월 21일 ~ 2003년 10월 9일 |
후 임 김경문 |
| 전 임 (초대) |
제1대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1991년 ~ 1992년 |
후 임 신명철 |
| 전 임 김경문 김응룡 |
대한민국 국가 대표 야구단 감독 2008년 ~ 2009년 2003년 ~ 2006년 |
후 임 조범현 김재박 |
| OB / 두산 베어스 감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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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울 레이더스 〈1991 ~ 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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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감독 | |
| 역대 코치 | |
| 역대 투수 | |
| 역대 포수 | |
| 역대 내야수 | |
| 역대 외야수 | |
| 연고지 |
전라북도 (1991~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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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홈 경기장 | |
| 플레이오프 진출 1996년, 1997년 | |
| 대한민국 국가 대표 야구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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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적 야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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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자 | |
| 코치 | |
| 투수 | |
| 포수 | |
| 내야수 | |
| 외야수 | |
| 하차 멤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