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 (183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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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1835년)
출생 1835년
조선 경기도 광주군
사망 1922년 (87)
일제 강점기 한국 경성부
거주지 조선, 일제 강점기
국적 조선,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별칭 호는 운양, 자는 순경
학력 한학 수학
직업 문신, 학자, 문장가
종교 유교(성리학)

김윤식(金允植, 1835년 ~ 1922년)은 문장가로 이름이 높던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문신, 문인, 학자이다. 자는 순경(洵卿), 호는 운양(雲養), 본관은 청풍이며 경기도 광주군에서 출생했다.

목차

[편집] 생애

김윤식

1874년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황해도 암행어사, 순천부사를 역임했다. 1881년(고종 18년) 영선사로 청나라에 파견됐다.

1882년 임오군란 때는 청나라에 원조를 요청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흥선대원군의 집정을 배척하는 민씨 일파와 결탁하여 흥선대원군을 톈진으로 압송시키게 하였다. 1884년(고종 21년) 전권대사 자격으로 러시아와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1894년 갑오개혁 후 김홍집 내각의 외부대신이 되어 개혁 정치에 힘썼다.

1908년 중추원 의장을 역임했고,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인 1910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으나,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박탈당하였다. 한일 병합 당시 “불가불가”(不可不可)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소극적인 반대를 표명했다. 당시 이용직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작성해 보냈다가 작위를 박탈당하고 2개월간 투옥되었다.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85세의 고령임을 이유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 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하고 은거 생활에 들어갔다. 1916년 박제순의 뒤를 이어 경학원 대제학을 지낸 것 외에는 거의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다.

[편집] 사후

김윤식 사망 후에 사회장 문제를 둘러싸고 민족운동 진영이 분열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결코 그가 의도했던 바는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

[편집] 참고자료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2월 1일). 〈김윤식 : 죽어서도 민족운동의 분열에 ‘기여’한 노회한 정객 (배항섭)〉, 《친일파 99인 1》.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1-7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개화정책과 그 반향〉

[편집] 관련 항목

[편집] 참고 문헌

  • 고종실록
  • 순종실록
  • 승정원일기
  • 일성록
개인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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