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섭 (목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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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섭(金永燮, 일본식 이름: 金光永燮, 1888년 ~ 1950년)은 한국의 감리교 목사이다. 호는 탁오실(濯悟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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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경기도 강화 출신으로 본래 군인이 되고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러나 을사조약 체결 후 학교가 폐쇄되자 강화 보창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 황해도 연안군의 봉남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연안에서 기독교 신자가 된 후 목회에 뜻을 두고 일본에 유학했다. 와세다 대학 문과와 아오야마학원 신학부에서 수학한 후 미국에도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했다. 1923년 미국 체재 중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7년 귀국한 뒤 서울의 정동제일교회와 중앙감리교회 담임 목사로 근무했다. 정동교회에서는 귀국 직후부터 1934년까지 7년간 1차로 재직했고,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재차 담임을 맡았다.[1] 목회자로 재임하면서 1930년대에 신흥우가 조직한 적극신앙단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외부 활동을 했으나,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흥업구락부 사건 이후 기독교계에서는 많은 전향 인사가 나오게 되는데, 김영섭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1938년 당시 경성기독교연합회 부위원장인 정춘수가 앞장서서 감리교 내선일체를 위해 7인 특별위원회를 조직했을 때 참가했고, 1939년 도쿄에서 조선과 일본의 감리교단 통합을 논의하는 회의가 개최되었을 때는 정춘수, 신흥우, 양주삼, 유형기 등과 함께 전권위원으로 참석했다.[2]
전시체제 아래서 일제는 종교단체법을 공포하여 종교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자 통합 교단 혁신교단이 결성 시도된 일이 있었다. 본래 혁신교단의 주축은 감리교단이었으며 장로교와의 합동을 위해 장로교 측의 전필순이 초대 통리로 추대되었다. 김영섭은 혁신교단에서 사무관장을 맡았다.[3]
광복 후 감리교단 내부에서 친일 청산을 둘러싸고 재건파와 부흥파로 분열이 일어났을 때, 내리교회 담임목사인 김영섭은 친일 행적이 뚜렷한 목회자 중 한 명으로 지목되었다.[4] 김영섭은 잠시 하와이 주 총영사를 지내다가 귀국하여 다시 중앙교회에서 시무하였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종교 부문에 선정되었다. 기독교대한감리회가 2005년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펴낸 자료집에서 공개한 감리교 내 친일 부역자 12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5]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참고자료
- 김영섭. 코이딕. 2008년 2월 17일에 읽어봄.
- 김영섭. 두산 엔싸이버 백과사전. 2008년 2월 17일에 읽어봄.
- 백기완, 송건호, 임헌영 (2004년 5월 20일). 《해방전후사의 인식 (1)》. 서울: 한길사, 294쪽. ISBN 8935655422.
- 한국개신교회의 어머니교회. 정동제일교회. 2008년 2월 17일에 읽어봄.
[편집] 주석
- ↑ 장규식. “개신교 예배당의 원형, 정동교회 - <장규식의 서울역사산책> 정동 일대 역사공간⑤”, 《프레시안》, (2003년 9월 20일). 2008년 2월 17일에 읽어봄.
-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2월 1일). 〈윤치호 : 2대째 일본 귀족으로 입적한 ‘귀화한 일본인’ (김도훈)〉, 《친일파 99인 1》.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17.
-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4월 1일). 〈전필순 : 혁신교단 조직한 기독교 황민화의 앞잡이 (김승태)〉, 《친일파 99인 3》.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31.
-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4년 3월 1일). 〈갈홍기 : 이승만 정부의 충실한 이념적 대변인 (김흥수)〉, 《청산하지 못한 역사 2》. 서울: 청년사. ISBN 9788972783138.
- ↑ 이승규. “감리회, 교단 내 친일인사와 독립운동가 명단 발표 - 광복 60주년 기념 예배자료집 발간…친일인사 선정 근거 없고, 교단 차원 친일은 빠져”, 《뉴스앤조이》, (2005년 8월 6일). 2008년 2월 16일에 읽어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