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 남산영당

금남 남산영당
(錦南 南山影堂)
대한민국 세종특별자치시문화재자료
종목문화재자료 제7호
(2012년 12월 31일 지정)
면적61.3m2
수량1동
시대조선시대
위치
금남 남산영당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금남 남산영당
금남 남산영당
금남 남산영당(대한민국)
주소세종특별자치시 남산길 51-4
좌표북위 36° 24′ 38″ 동경 127° 15′ 0″ / 북위 36.41056° 동경 127.25000°  / 36.41056; 127.25000
정보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남산영당
(南山影堂)
대한민국 충청남도문화재자료(해지)
종목문화재자료 제72호
(1984년 5월 17일 지정)
(2012년 7월 1일 해지)
정보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금남 남산영당(錦南 南山影堂)은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에 있는 조선시대 남이웅(1575∼1648)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2012년 12월 31일 세종특별자치시의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1]

개요[편집]

남이웅(1575∼1648)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광무 10년(1906) 유림들이 세웠다.

조선 선조, 광해군, 인조 때 정치가였던 선생은 평소 법을 준수하고 사치를 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광해군 5년(1613)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병조좌랑 등 여러 벼슬을 하였으며, 병자호란 때는 소현세자중국 심양으로 잡혀갈 때 극진히 모시고 따라갔다와 후에 춘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인조 16년(1638) 대사헌이 된 후 법을 철저하게 집행하였으며, 미신을 없애려고 무당을 박해하기도 하였다.

사당 뒤쪽으로 선생의 묘소와 묘비가 있다.

현지 안내문[편집]

남이웅(南以雄, 1575~1648) 선생의 영을 모신 사당으로 1906년에 세웠다. 조선 선조, 광해군, 인조때 정치가였던 선생은 평소 법을 준수하고 사치를 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광해군 5년(1613)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병조좌랑 등 여러 벼슬을 하였으며, 병자호란때에는 소현세자가 중국 심양으로 잡혀갈 때 극진히 모시고 따라갔다 와 후에 춘성부원군에 봉해졌다.[2]

인조 16년(1638) 대사헌이 된 후 법을 철저하게 집행하였으며, 미신을 없애려고 무당을 박해하기도 하였다. 1646년 우의정이 되었으며 소현세자의 빈 강씨의 사사(賜死)를 반대하여 사직하였다가 복귀하였으며 1648년 좌의정이 되었다.[2]

사당 뒤쪽으로 선생의 묘소와 효종 9년(1658년)에 건립한 묘비가 있다.[2]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세종특별자치시 고시 제2012 - 63호,《세종특별자치시 지정문화재 및 문화재자료 지정 고시》, 세종특별자치시장, 2012-12-31
  2. 현지 안내문 인용

참고 자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