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나정

경주 나정
(慶州 蘿井)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사적
종목사적 제245호
(1975년 11월 20일 지정)
면적29,599m2
위치
경주 나정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경주 나정
경주 나정
경주 나정(대한민국)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700-1번지
좌표북위 35° 48′ 57″ 동경 129° 12′ 45″ / 북위 35.81583° 동경 129.21250°  / 35.81583; 129.21250
정보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경주 나정(慶州 蘿井)은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에 위치한 우물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탄강전설(誕降傳說)이 깃든 곳이다. 1975년 11월 20일 사적 제245호로 지정되었다.[1]

위치[편집]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700-1번지에 있는 우물은 오릉(五陵)의 동남쪽 소나무 숲이 무성한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이 우물터에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탄생했다고 전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 조선 순조 2년(1802)에 박혁거세를 기리기 위해 시조유허비(始祖遺墟碑)세웠다. 현재 오릉에서 동남쪽을 바라보면 1km쯤 떨어진 소나무숲에 유허비가 있어 옆에 나정이라 부르는 우물을 박혁거세의 탄강한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1]

전해지는 이야기[편집]

신라가 세워지기 전의 경주지역은 진한의 땅으로 6명의 촌장들이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 중 고허촌장인 소벌도리공이 양산 기슭 우물가에서 흰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가보니 크게 빛나는 알이 있었다. 얼마후 알 속에서 남자아이가 태어나자 하늘에서 보내준 아이로 생각하여 정성드려 키웠다. 박처럼 생긴 알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성을 박(朴)이라 정하고, 세상을 밝게 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고 불렀다. 아이가 13살이 되던 해인 B·C 57년 왕의 자리에 올라 나라를 세우니 바로 서라벌이었다.

신라(新羅)의 건국신화(建國神話)에 대해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다 같이 언급되어 있으나 후자(後者)의 것이 더 상세하고 신화적(神話的)인데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한(前漢) 지절원년(地節元年) 임자((壬子) B.C 69) 3월, 초하룻날 신라(新羅) 건국(建國)의 주역(主役)들인 육촌(六村)의 촌장(村長)들이 각각(各各) 그 자제(子弟)를 거느리고 알천(閼川)옆의 언덕에 올라 회합을 갖고 육촌(六村)에는 다스릴 군주(君主)가 없어 백성들이 방일(放逸)하여지고 나태하여지니 유덕(有德)한 인물(人物)을 선출하여 군주(君主)로 모시고 도읍(都邑)을 정하자고 결정하였다. 이와같이 결정을 한 후에 그 일행(一行)이 높은 곳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양산(陽山)아래에 있는 나정(蘿井)이라고 하는 우물근처에 이상야릇한 기운(氣運)이 전광(電光)처럼 땅에 드리워져 있었고 백마(白馬)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경배(敬拜)하듯 하고 있었다.

이러한 광경을 바라본 일행(一行)은 모두 나정(蘿井)으로 달려가서 보니 그곳에는 붉은 색의 커다란 알(卵) 하나가 있었는데 백마(白馬)는 사람들을 보자 길게 울부짖으며 하늘에 올라가버렸다. 육촌(六村)의 사람들이 그 알을 쪼개어 보니 의외로 자태가 단정한 어린 사내아이 하나가 있었다. 나정(蘿井)에 모였던 육촌(六村)의 촌장(村長) 이하(以下) 모든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겨 동천(東川)에서 목욕시키니 어린아이의 몸에서 광채(光彩)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어울려 춤 추듯 놀고 천지(天地)가 진동(振動)하고 일원(日月)이 청명(淸明)해졌다.

모든 사람들은 이 어린아이가 세상을 밝게 한다해서 혁거세(赫居世)라 이름하고, 같은 날에 알영정(閼英井)에서 계룡(鷄龍)의 왼쪽 옆구리에서 태어난 계집아이 알영(閼英)과 함께 짝지워 남산서록(南山西麓)에 궁(宮)을 마련하여 놓고 봉양(奉養)하였다. 이성아(二聖兒)의 나이가 13세 되던 해인 오봉원연갑자(五鳳元年甲子)(B.C. 57)에 남아(男兒)를 왕(王)으로, 여아(女兒)를 왕후(王后)로 삼았으며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로 하였다. 육촌(六村)사람들은 혁거세(赫居世)가 태어난 알이 마치 박처럼 생겼다고 하여 그의 성(姓)을 박(朴)으로 하였다.[1][2]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 참조
  2. 경주 손원천기자 (2012년 7월 5일). “경주 남산의 재발견…신라 1000년의 미소와 만나는 길”. 서울신문. 2013년 7월 15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