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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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망
본명 왕망(王莽)
재위 8년 ~ 25년
다른 이름 거군 ()
배우자 왕씨(의성후 왕함의 딸)
자녀 왕우, 왕획, 왕안, 왕임, 왕흥, 왕광, 왕황후(평제의 황후), 왕엽, 왕첩 등
부친 왕만
모친 공현군
왕조 신나라
묘호 (없음)

왕망(王莽, 기원전 45년 ~ 기원후 25년 10월 6일)은 신나라의 초대 황제이다. 즉위전의 작위는 안한공(安漢公)이며, 전한 원제의 황후 효원황후(孝元皇后,왕정군)의 조카로, 왕만(王曼)의 차남이다. 왕망은 아버지의 이복동생인 왕정군이 효원황후가 되자, 그녀의 도움으로 섭정이 되었다. 시호는 가황제(假皇帝)·섭황제(攝皇帝)이다.

목차

생애 [편집]

초기 생애 [편집]

황후의 자리에 오른 백모 왕정군에 의해 백부들이 제후에 봉해지고, 고위 관리로서 유복한 생활을 보내는 가운데, 아버지 왕만과 형 왕영(王永)이 일찍 사망하여 왕망은 불우하게 자랐다. 왕망은 공손하고 검소함을 가지고, 패군(沛郡)의 진삼(陳参)을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고, 유생의 복장을 입고, 어머니와 형수를 시중들었다. 또 조카의 왕광(王光)을 양자를 삼아 친자식 이상으로 양육하여, 왕망의 아내가 불평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권력을 장악하다 [편집]

백부 대장군 왕봉(王鳳)이 병이 들자, 간병을 하였고, 왕봉의 인정을 받았다. 왕봉이 죽은 이후, 왕상(王商)과 왕근(王根)의 추천과 백모인 황태후의 후원으로 왕망은 순조롭게 출세한다. 친척 순우장(淳于長)을 실각시켜, 대사마(大司馬)가 되면서, 왕망의 기세는 하늘을 나는 새를 떨어뜨릴 정도로 되었다. 애제(哀帝)때에 신흥 외척의 압박을 피하여 한때 정계에서 물러났으나, 정계 복귀의 탄원이 계속 올라오자 그는 정계 복귀를 한다.

영시 원년(기원전 16년), 신도후(新都侯)에 봉해졌다. 애제가 붕어하자 애제로부터 황제의 옥새를 맡고 있던 대사마 동현(董賢)으로부터 옥새를 강탈하여, 중산왕 간(衎, 평제(平帝))을 옹립 하고 대사마가 되었다. 유학과 예언에 근거한 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민중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차남 왕획(王獲)을 잡아 노복(奴僕)을 죽인 것을 죄에 물었고, 장남 왕우(王宇)를 모략을 한 것으로 감옥에 보내고, 모두 자살시켰다. 딸을 평제의 황후에 책봉하고, 재형(宰衡), 안한공(安漢公)이 된 후, 5년에는 14살이 된 평제를 독살하고, 광척후 유현(廣戚侯 劉顕)의 아들 유영(劉嬰)을 황태자를 세워서 스스로는 가황제(假皇帝)·섭황제(攝皇帝)로서 섭정을 하였다.

황제가 되다 [편집]

거섭 3년(8년), 왕망은 고조(高祖)의 영혼에게 선양을 받았다고 하여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신나라를 건국했지만, 그 실상은 찬탈과 다름이 없었다. 태황태후로서 전국 옥새를 맡고 있던 효원황태후 왕정군(孝元皇太后 王政君)은 옥새 수령하러 온 왕망의 사자 왕순(王舜, 왕망의 사촌형제)에게 옥새를 내던져 왕망을 몹시 나쁘게 매도했다고 사서는 전한다.

왕망은 주나라 시대의 치세를 이상으로 했지만, 현실성이 결여된 각종 정책은 단기간에 파탄되었다. 또 고구려의 이름을 중화사상에 근거하는 모멸적인 명칭인 하구려(下句麗)로 개명하여 고구려와 충돌하였다. 또 전매제의 강화도 실패하여 신나라의 재정은 빈곤해졌다.

반란과 최후 [편집]

18년적미의 난이 일어났고, 각지의 농민과 호족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켰다. 남양군(南陽郡)에서 옹립 된 유현(劉玄, 경시제)을 토벌하러 보낸 신나라의 100만 군대도 곤양(昆陽)전투에서 경시제 휘하의 유수(劉秀, 광무제)에게 패배하여, 이것으로 각지에 군웅이 할거하여 대혼란에 빠진다. 그의 신하도 배신하고, 장안에는 경시제의 군대가 입성, 왕망은 그 혼란 중에서 두오(杜呉)라고 하는 사람에게 살해당했다. 왕망의 죽음으로 신나라는 멸망하였다.

전 임
초대 군주
제1대 황제
8년 - 25년
후 임
-
(황조 멸망)
(한 경시제)
전 임
(사실상)한 유자영 유영
중국 황제
8년 - 25년
후 임
한 경시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