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 6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강동육주에서 넘어옴)
이동: 둘러보기, 찾기

강동 육주(江東六州)는 993년(고려 성종 12년) 요나라제1차 침입서희가 요나라 장수 소손녕과 담판하여 얻은 고려 서북면의 영토이며, 군사상·교통상의 요지였던 이곳은 여진족이 거주하여 고려의 북방 진출에 큰 장애가 되었다.

이 땅은 압록강 동쪽 280여 리, 곧 홍화진(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천), 철주(철산), 귀주(구성), 곽주(곽산)이며, 이 강동 육주의 북쪽 국경에 쌓은 장성이 고려의 천리장성이다.

[편집] 경과

고려는 요나라(거란)의 1차 침입 때 서희가 담판하여 요나라과 통교할 것을 조건으로 요나라로부터 얻은 강동에서 여진족을 몰아낸 뒤 994년 장흥진(長興鎭, 태천), 귀화진(歸化鎭, 위치 미상), 귀주(구주), 곽주에 성을 쌓았고, 995년 다시 안의진(安義鎭, 안주), 흥화진에, 996년에는 선주(宣州, 선천)·맹주(孟州, 맹산)에 성을 쌓고, 요나라에 적의를 보였다.

그런데 그 뒤에도 고려가 송나라와 친선 관계를 이어가며 요나라와 교류하지 않자 요나라는 불만을 가졌다. 이에 요나라는 강조의 정변을 계기로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1010년 요나라 성종(聖宗)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하였다. 이때 요나라 군대의 뒤에서 양규가 선전하자 퇴로가 끊길 수도 있음을 염려한 요나라 군대는 고려와 강화하고 퇴각하였다.

여러 차례 소규모 전투가 벌어지다가 1018년 요나라는 다시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였다. 개경 부근까지 진입한 요나라 군대는 도처에서 고려군의 저항을 받고 퇴각하던 도중 1019년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귀주에서 거의 전멸하였는데, 이를 귀주대첩이라 한다.

[편집] 결과

이후 고려와 거란은 압록강을 경계로 국경을 접하게 된다. 고려는 보주를 제외한 압록강 이남의 영유권을 인정 받고 사대를 조건으로 화친을 맺었다. 아울러 고려에서는 요나라와 여진족을 막으려고 흥화진 북쪽의 압록강 어귀에서부터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게 된다. 사실상 고려 북진정책의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으며, 북진 전진 기지인 서경의 입지는 크게 약화되어, 훗날 묘청의 난과 고구려 부흥운동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편집] 함께 보기

Heckert GNU white.svgCc.logo.circle.svg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개인 도구
이름공간

변수
행위
둘러보기
인쇄/내보내기
도구모음
다른 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