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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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로 델 폴라이우올로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 우피치 미술관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이탈리아어: Galeazzo Maria Sforza, 1444년 1월 24일 ~ 1476년 12월 26일)는 밀라노의 공작이다(재위: 1466년 ~1476년).

그는 대대로 밀라노의 군주들을 배출한 스포르차 가문의 일원으로, 미술과 음악의 후원자로 유명하다. 또한, 그는 호색적이고 잔인하고 포악하기로 유명했다.

그는 인기 있는 콘도티에리이자 코시모 데 메디치의 동맹자로 비안카 마리아 비스콘티와 결혼으로 밀라노 공국을 손에 넣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아들이다. 첫 번째 아내 도로테아가 죽자 그는 사부아 공국과의 불화를 해결하려고 사부아 공작의 딸 사보이의 보나와 결혼하였다. 갈레아초는 밀라노의 산토 스테파노 성당에서 살해당했다. 밀라노 공작의 지위는 아들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가 물려받았고, 갈레아초 마리아의 동생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섭정으로서 권력을 장악했다.

후원[편집]

갈레아초 마리아는 음악의 후원자로서 유명했다. 그의 지도로 재정 지원과 장려가 활발해져 그의 악대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하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음악 공연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북부 작곡가, 특히 오늘날 베네룩스 출신의 프랑스-플랑드르 작곡가들이 악단에 초빙되어 노래를 부르고 미사곡을 썼으며, 공작을 위한 모테토와 세속적 음악도 썼다. 그 가운데 유명한 사람을 몇 명 열거하자면, 알렉산더 아그리콜라, 요한네스 마르티니, 루아제 콩페르 그리고 가스파르 반 베르베케 등이 있다. 그러나 악단원들의 대다수는 갈레아초 마리아가 살해당하자 도망쳐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그 결과, 페라라 같이 음악적 수준이 보통이었던 도시들의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평판[편집]

음악에 대한 애정에도, 갈레아초 마리아는 잔혹한 경향 또한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그는 자기 여자가 싫증 나면 가신에게 줘버리는 등 악명 높은 바람둥이였다. 한 가신은 산 채로 궤 속에 매장되었고, 또 다른 가신은 갈레아초 마리아의 애인과 이야기했다는 이유만으로 두 손이 잘렸다. 그리고 그의 치세가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예측했던 사제는 굶어 죽게 만들었다. 그는 “욕망과 재능을 겸비한 힘센 괴물”이라고 당시의 페라라 연대기는 전하고 있다.

암살[편집]

갈레아초 마리아 공작의 애가(1476).

갈레아초 마리아의 죽음에는 밀라노 궁정의 적지 않은 수의 고위 관료들이 연관되어 있었으며, 그 가운데 카를로 비스콘티, 제롤라모 오르시아티, 조반니 안드레아 람푸냐니 등 세 명의 암살자가 주체 인물이었다. 람푸냐니는 전임 공작인 프란체스코 스포르차한테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현재 공작인 갈레아초 마리아가 그의 죄를 사면해주었다. 그러나 밀라노에 스포르차 가문이 버티는 한 그는 장래에 어떤 희망도 품을 수 없었다. 비스콘티는 스포르차 가문에 합병된 비스콘티 가문의 현 상태에 심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게다가 밀라노 공작의 눈에 들어 사랑을 받다가 버림받은 누이에 대한 동정이 분노가 되어, 그 불만에 불을 붙였다. 주로 공작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음모에 가담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오직 공화주의자였던 오르시아티만이 밀라노를 군주제에서 해방하자는 취지를 진심으로 믿었다.

1476년 성탄절 이튿날, 음모자들은 갈레아초 마리아를 수행하는 일행이 성 스테파노의 축일 기념 미사가 열리는 산토 스테파노 성당으로 가는 것을 신중하게 살펴보았다. 세 남자는 약 서른 명의 친구들의 지지를 받으며 미리 성당 앞에 나와 공작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공작 행렬이 도착하자 람푸냐니는 갑자기 공작 앞으로 뛰쳐나와 무릎을 꿇어 존경의 표시를 하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 그는 소매 속에 감추고 있던 단검을 빼들어 공작의 사타구니와 가슴을 힘껏 찔렀다. 오르시아티와 비스콘티도 가세하여 공작에게 칼을 휘둘렀다.

갈레아초 마리아는 결국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다. 모든 암살자가 재빨리 도망갔지만, 람푸냐니만은 공작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흑인 하인에 의해 창에 찔려 죽어버렸다. 람푸냐니의 시신은 목이 잘린 다음 날, 산 채로 사지가 잘려 시가지를 향한 성벽에 매달렸다.

암살의 여파[편집]

사건 초기에 시민들은 활력이 감퇴했지만, 정부가 신속하게 질서를 바로잡은 덕분에 민심이 북돋아졌다. 달아났던 비스콘티와 오르시아티는 며칠 뒤에 곧 붙잡혀 처형되었다. 그들 역시 산 채로 사지가 찢기는 형벌을 받았다. 세 사람을 선동했던 인문주의자 콜라 몬타노는 밀라노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나폴리 왕에게 달아났지만, 그 역시 나중에 나폴리 왕과 싸우던 피렌체로렌초 일 마니피코의 명령으로 교수형 되었다.

자녀[편집]

갈레아초 마리아는 두 번째 아내 사보이의 보나 사이에서 세 명의 아이를 낳았다:

애첩 루크레치아 란드리아니와의 사이에서는 사생아인 딸 한 명을 낳았다:

바깥 고리[편집]


전 대
프란체스코 1세
밀라노의 공작
1466년 ~ 1476년
후 대
잔 갈레아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