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하라 가즈오 (각본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가사하라 가즈오(일본어:
[편집] 연혁
- 1927년 도쿄・니혼바시에서 태어난다.
- 1945년 해군 특별간부연습생에 지원, 히로시마 현 오타케 해병단에 입대한다.
- 1946년 니혼 대학 미시마 예과에 입학한다.
- 1949년 니혼 대학 법학부 신문학과에 입학한다.
- 1954년 도에이에 입사, 선전부에 배속된다.
- 1956년 도에이의 사내 시나리오 콩쿠르에서 1위로 입선했다. 이후 프로 각본가로서 집필을 시작한다.
- 1969년 《일본 암살 비록》으로 제16회 교토 시민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다.
- 1976년 도에이를 퇴사하고, 프리랜서 각본가가 된다.
- 1981년 《203고지》로 일본 아카데미상 우수 각본상을 수상한다.
- 1983년 《대일본제국》으로 일본 아카데미상 우수 각본상을 수상한다.
- 2002년 12월 12일에 니시쿠보 병원에서 향년 76세, 폐렴으로 사망했다.
[편집] 인물・에피소드
- 치밀하고 철저한 취재에 근거해 집필한 많은 작품은 일본 영화사를 말하는 데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목장을 무대로 한 인협 영화에서는 직인들이 쓰던 은어집을, 《203고지》에서는 당시의 날씨 등도 기록된 두루마리처럼 긴 자료집을 만드는 등 취재에 관련된 에피소드는 빠지지 않는다.
- 새 영화 기획을 위해 이이보시 고이치를 방문했던 가사하라는 어느 야쿠자의 수기를 발견하고, 이이보시로부터 영화화를 권유받았다. 가사하라는 빨리 그 수기의 저자인 전 폭력조직 두목이었던 미노 고조를 찾아갔지만, 미노는 “영화화를 바라고 수기를 쓴 게 아니다”며 영화화를 거부했다. 가사하라는 이 기획을 포기했지만 우연히 미노와 가사하라가 해군 오타케 해병단의 1기 차이로 입대했던 사실을 알게되었고, 친분을 갖게 된 미노는 “절대로 영화화하지 않는다”라는 조건으로 히로시마 항쟁의 뒷이야기를 차례차례로 이야기했다. 가사하라는 서둘러 도쿄로 돌아와서 각본을 집필, 다음 해에 빨리 공개되었다. 이 영화가 《인의없는 전쟁》이다.
- 《인의없는 전쟁》의 0호 시사를 본 가사하라는, 후카사쿠의 연출에 의한 템포가 빠른 이야기 전개에 대해, 자신이 쓴 대사가 무사당했다는 인상을 갖고 크게 불만을 털어놓았지만, 주위에서는 “이 템포가 좋지 않나”라고 칭찬했고, “신경쓰인다고 말하고 있던 사람은 각본을 쓴 나뿐이었다”라고 이야기하였다. 그 뒤 몇번인가 작품을 보고 있는 와중에 “이상하게도 좋은 영화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라고도 이야기했다.
- 그 후카사쿠는 완성도가 높은 가사하라 작품을 칭송했고, 《현경찰 대 조직폭력》에서는 “각본이 너무 완벽해서 영화화할 수 없다”라고 약한 소리를 했다고 한다. 만년에는 가사하라의 작품집을 반복해서 읽고 있었다는 후카사쿠는, 가사하라의 사망으로부터 1개월 뒤에 뒤를 따르듯이 사망했다.
[편집] 출판 작품
- 《가사하라 가즈오 시나리오집:인의없는 전쟁》(1977년)
- 《갑옷을 입고 있는 남자들-야쿠자는 남성 사회의 패러디》(1987년)
- 《2/26》(1989년)
- 《후쿠자와 유키치-일본을 세계로 열은 남자》(1991년)
- 《인의없는 전쟁-인의없는 전쟁・히로시마 사투편・대리전쟁・정상작전》(1991년)
- ※《가사하라 가즈오 시나리오집》을 제목을 바꾼 것.
- ※《갑옷을 입고 있는 남자들》을 수정한 것.
- 《인의없는 전쟁 조사・취재록 집성》(2005년)